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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무왕-신라 선화공주의 사랑은 전설로만 남나

이슈&화제

by 윤재훈 2009. 1. 20.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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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무왕-신라 선화공주의 사랑은 전설로만 남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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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제사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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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사지 금제사리봉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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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리장엄 출토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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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제관식 및 금제소형판 등 유물

익산 미륵사는 백제 서동왕자가 신라 진평왕의 딸인 선화공주를 아내로 맞아들인 후 왕비를 위해 용화산(龍華山) 아래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삼국유사가 기록을 통해 전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삼국유사에도 익산 미륵사의 정확한 창건시기와 목적 등은 언급돼 있지 않다.

그동안 설화로 전해져온 백제 무왕과 선화공주의 러브스토리의 사실 여부를 유추, 해석해볼 수 있는 주요 유물들이 익산 미륵사지 석탑에서 대거 발굴됐다.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소장 김봉건)는 국보 11호이자 ‘백제 문화유산의 진수’인 익산 미륵사지석탑에서 금제사리호와 금제사리봉안기 등 무려 500여점에 달하는 국보급 유물이 대거 쏟아져 나왔다고 19일 밝혔다.

국립문화재연구소측은 “지난 14일 미륵사지 석탑의 보수를 위해 탑을 해체하던 중 1층 심주 윗면 중앙에서 사리공을 발견하고, 그 안에서 백제 왕실의 안녕을 위해 무왕 왕후가 무왕 재위 기해년(639년)에 조성했다는 기록이 담긴 사리장엄구를 발견했다”고 밝혔다.

이 사리장엄을 통해 그동안 창건시기와 내력이 삼국유사 등에 ‘대중의 관심을 끄는 전설’로 널리 전해져온 익산 미륵사가 백제 제30대 무왕(武王.재위 600-641년) 때 무왕의 지원 아래 백제 왕후가 창건한 것으로 확실히 규명됐다. 그동안 익산 미륵사의 정확한 창건연대는 삼국유사는 물론이고, 삼국사기에도 보이지 않지만 이번 사리장엄 발굴로 무왕 재위시대의 기해년(己亥年), 즉 서기 639년(무왕 재위 40년)으로 확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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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미륵사지 석탑

사리공에서는 사리를 담은 ‘금제 사리호’(金製 舍利壺)와 석탑 조성내력을 적은 금판인 ‘금제 사리봉안기’(金製 舍利奉安記), 백제 특유의 머리꽂이 장식인 은제관식 등 다양한 유물 500여 점이 나왔다. 이중 금제사리호는 백제 금속공예의 우수성을 여실히 입증해주는 병 모양의 사리호. 사리장엄의 핵심으로 사리공 중앙에 모셔져 있었던 금제사리호는 높이 13㎝, 어깨 폭 7.7㎝의 작은 병 형식이며 보주형(寶柱形) 뚜껑이 덮여 있었다. X선으로 사리호 내부를 투시한 결과 내외함의 이중구조로 이뤄져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금제사리봉안기는 가로 15.5㎝, 세로 10.5㎝ 크기의 금판에 음각하고 붉은 칠(주칠)을 해 글씨가 명확하게 드러나도록 했다. 그 내용은 백제 왕후가 재물을 희사해 가람(伽藍)을 창건하고, 기해년(639년)에 사리를 봉안해 왕실의 안녕을 기원한다는 내용이 기록돼 있다. 이번 발굴에서는 무왕의 왕후가 선화공주가 아닌, 백제 귀족 출신으로 추정할 수 있는 명문이 나와 설화로 널리 전파돼온 ‘서동왕자와 신라 선화공주간 사랑’이 단지 ‘전설’로 그칠 가능성이 커졌다.

향후 명문을 정확히 해석해봐야 하나 “백제 왕후가 좌평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따님으로 지극히 오랜 세월에 선인(善因)을 심어”라는 구절이 발견돼 판독자에 따라서는 “백제 왕후와 사택적덕의 딸”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백제 왕후를 백제 고관의 딸로 파악할 수 있는 것. ‘사택’은 당시 백제의 8대 성(姓) 중 하나다.

이처럼 미륵사의 창건목적과 시주(施主), 석탑의 건립연대 등을 정확히 밝힘으로써 문헌사 연구의 부족한 점을 보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번 유물은 매우 귀중한 금석문(金石文) 자료로 평가된다. 동시에 백제시대 서체 연구에도 큰 획을 그을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이건무 청장은 “미륵사지 석탑에서 발견된 사리장엄은 다른 사례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다양한 종류가 일괄 출토됐고, 가공수법도 정교하고 세련돼 국보급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국보급 유물로 평가된다”고 평가했다.

이어 “이번 사리장엄의 발견으로 미륵사 창건에 관한 삼국유사와 삼국사기 기록의 정확성이 입증됐고 백제석탑의 사리봉안 기법과 의례를 새로이 밝힐 수 있게 됐다"고 반겼다. 아울러 매납(埋納)된 유물의 절대연대 확정을 통해 동시기 유물의 편년(編年)이 가능해졌다고 덧붙였다.

문화재청은 이번 발견이 무령왕릉 발굴과 능산리 금동대향로 조사 이래 백제지역 최대의 고고학적 성과라고 보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백제문화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열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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