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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마지막 산성과 왕궁터

역사학습

by 윤재훈 2008. 11. 21. 2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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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마지막 산성과 왕궁터

김남곤의 꽃피는 문화유산

조용하고 한적한 느낌을 주는 소도시 부여는 123년간의 역사를 간직한 백제의 도읍지였다. 화려하고 찬란했던 백제의 문화가 마지막으로 꽃을 피웠던 도시 부여. 그 속에 백제의 흥망성쇠를 함께했던 산성이 나지막이 지켜보고 있다.
부소산성 정문
  백제가 고구려의 힘에 밀려 남으로 남으로 점차 밀리면서 백제 성왕 16년(538)에 웅진(지금의 공주)에서 사비(부여)로 수도를 옮기게 된다. 이때 백제의 왕궁을 수호하기 위하여 백마강 남쪽 부소산을 감싸며 성을 쌓는다. 그 성이 바로 사비시대의 도성 부소산성이다. 『삼국사기』「백제본기」에는 사비성, 소부리성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언제부터인가 성이 위치한 산의 이름을 따서 부소산성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부소산성 반월루
   이 산성은 부여 쌍북리에 있는 백제시대의 산성으로 흙과 돌을 이용하여 쌓아다. 동성왕 22년(500)경에 이미 산 정상과 능선을 둘러쌓은 테뫼식 산성이 있던 것을 무왕 6년(605)경에 다시 그 주위를 감싸게 쌓은 포곡식이 혼합된 복합식 산성이다. 둘레는 대략 2.5km, 면적은 약 74만㎡에 달한다.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수도를 방어한 곳으로 성 안에는 군창터, 영일루, 반일루, 사자루, 고란사, 낙화암 등이 남아있다. 이것으로 보아, 유사시에는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하였고, 평상시에는 백마강과 부소산의 아름다운 경관을 왕족들이 즐기던 곳으로 쓰인 듯하다. 공주의 공산성과 마찬가지로 금강변의 언덕에 자리 잡고 있는 부소산성은 백제의 멸망을 맞은 마지막 산성이며 왕궁 터이다.
부소산성 소나무 숲길
   부소산성은 우리에게 알려진 이름에 비하여 규모가 작은 동산 위에 숲으로 아름답게 잘 꾸며진 산성이다. 정문인 사비문에서 시작하여 고란사까지 약 2km 정도 소나무 숲길을 따라 산책 할 수 있다. 조금 오르막이긴 하지만 산이 높지 않고 주변이 무척 잘 정비되어 있어 걷기에 적당하다. 오르는 길 중간 중간에 볼거리가 있어 전혀 지루하지 않다.
부소산성 삼충사
   처음 만나는
삼충사는 백제의 마지막 충신인 성충, 흥수, 계백 세 사람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이 사당은 백제말엽 의자왕(641-660)에게 충성을 바친 삼충신의 위국충절을 추모하기 위해 1957년 건립한 것이다.
부소산성 영일루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계 팔작지붕 형태로 만들어진 영일루는 조선 후기 건축물로 2층 누각이며 그리 오래되지 않은 건축물이다. 원래 이곳에 세워져 있던 누각이 아니고 다른 곳에 있던 조선시대 관아 문을 이곳으로 옮겨놓은 것이다. 조선시대의 여러 관아 문에 비해서 그 규모가 비교적 크고 정교하다.
부소산성 군창터
   궁창지는 산성의 곡식을 저장하는 창고 역할을 했던 곳이며, 수혈주거지는 선사시대 움집의 흔적이 있는 곳이다. 반월루는 백마강과 부여 시가지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남쪽 마루에 있으며 전망하기에 좋은 장소이다.
부소산성 사자루
   부소산성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사자루는 달구경을 했다는 송월대가 있던 자리다. 백제시대에는 망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19년 임천관아의 문루였던 개산루를 이곳에 옮겨 지으면서 사자루라 이름 하였다. 사비루의 현판 글씨는 조선말 의친왕 이강공이 쓴 것이다. 사비루도 사방이 트여있어 부여주변의 풍경을 즐길 수 있는 좋은 누각이다.
부소산성 낙화암
  
낙화암
은 부소산 북쪽 깎아질 듯 한 낭떠러지 절벽바위로 백제 멸망의 한이 깃든 장소 이기도하다. 백제 의자왕(641∼660)때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이 일시에 수륙양면으로 쳐들어와 강탈하자, 삼천궁녀들이 그 몸을 꽃잎처럼 떨어져 백마강에 원혼을 묻어 던 장소이다. 낙화암 꼭대기에 세워진 육각형의 백화정은 당시 절벽에서 떨어진 백제여인들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1929년에 세운 정자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때 삼천명이나 되는 궁녀가 떨어졌을 리는 만무하다. 당시 백제의 인구나 생산능력 등을 고려해도 궁에서 삼천명이나 되는 궁녀를 둘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나 백제고기에 따르면 원래 낭떠러지의 이름은 타사암 이었다고 하는데 국제적인 외교전쟁에서 실패한 백제의 군주를 폄하하고 사치와 방탕으로 일삼은 왕으로 만들어낸 날조된 전설이리라 여겨진다.
부소산성 고란사
   고란사는 낙화암 아래 자리 잡고 있는 사찰로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진 것과는 달리 규모가 작은 암자와 같다. 그러나 사찰 그 자체보다는 절 뒤편에서 솟아나는 약수와 고란초의 전설이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 주위의 경관이 비할 데 없이 아름답고 유서 깊은 사적지 내에 있기에 더욱 유명하다.
부소산성 수혈주거지
 
부소산성은 주위의 보조 산성인 청산성·청마산성과 함께 도성을 방어하는 구실을 했으며,  평시에는 왕과 귀족들이 아름다운 경관을 즐기는 비원으로 활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백제의 수도가 함락당하고 663년 백제부흥을 위하여 백제와 일본연합군의 연합수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백촌강 이기도한 백마강은 백제의 부흥운동이 성공하였다면 우리의 역사는 어떤 방향으로 변했을까 궁금하다.
부소산성 산책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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