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질고 능력있는 성군(聖君)도 막후에선 공작정치를 펼쳤고, 험한 말도 마구 쏟아낸 것으로 밝혀졌다. 학문을 사랑하고 선비 같은 국왕으로 칭송받던 조선 제22대 국왕 정조(正祖). 조선조 최고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어진 임금 정조가 재위 말년에 우의정과의 비밀편지를 통해 ‘막후정치’를 주도면밀하게 펼쳤음을 보여주는 비밀편지 299통이 최초로 공개됐다.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과 한국고전번역원 번역대학원은 9일 오전 성균관대 600주년 기념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정조가 예조판서와 우의정 등을 역임한 노론 벽파(僻派)의 거두 심환지(沈煥之, 1730~1802)에게 보낸 비밀 어찰첩(御札帖)을 공개했다. 300통에 달하는 이 편지들을 탈초(정자로 풀어쓰기)하고 해독한 결과, 정조는 여론에 대단히 민감해 공작하려 한 측면이 많았음이 확인됐다. 또 정조의 입 앞에선 온전한 사람이 없었을 만큼 주위 인물들에게 욕설을 마구 쏟아냈다.
이를테면 최측근인 서용보를 ‘호로자식’이라 폄하했는가 하면, 자신이 아끼는 신하인 한원진을 비판했다 하여 김매순을 ‘입에서 젖비린내가 나고 미처 사람꼴을 갖추지 못한 놈’으로, 김이영을 ‘경박해서 동서도 분간 못하면서 선배들에게 주둥아리를 놀리는 놈’이라고 비난을 퍼부었다. 또 19세기 대표적 학자인 김매순 등 많은 명사도 정조로부터 심한 욕설을 들었다.
뿐만 아니라 정조는 고위 관료의 사생활까지도 일일이 간섭했다. 정조는 비밀편지에서 “충청도 관찰사에게는 술을 절제해 감히 체통을 손상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엄중히 신칙하였는가”라고 거듭 확인했다.
1796년 8월 20일부터 1800년 6월 15일까지 오고간 이 편지들은 모두 정조가 친필로 써 심환지 한 사람에게 보낸 것으로, 정조 말년 국왕을 중심으로 정국 동향을 파악할 수 있는 획기적 자료로 평가된다. 비밀편지에는 국왕과 대신이 국정 현안을 놓고 갈등하고 조정하며, 첩보를 수집하고 여론 동향을 캐는 다양하고 은밀한 통치행위의 비밀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이 어찰첩은 조선시대 어찰로는 역대 최대 분량인 데다, 더욱 중요한 점은 정조가 지속적으로 없애라고 명령한 비밀편지를 심환지가 거부하고 고스란히 모은 것이 기적적으로 남아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국왕의 비밀편지가 이렇듯 대량으로 발굴된 예는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어 보물급으로 평가되고 있다.
성균관대 한문학과 안대회 교수는 “국왕과 대신 사이에 국정 현안을 놓고 갈등하고 조정하고 첩보를 수집하며 여론 동향을 캐는 다양하고 은밀한 통치행위의 비밀이 담겨 있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가치를 지닌다”고 평가했다.
또한 이 편지들은 수신자인 심환지 쪽에서 어찰을 받은 날짜와 시간, 장소를 기록해 두었다는 점에서도 역사적 가치를 더한다. 이번 어찰첩의 발굴로 정조시대 정국 동향은 물론이고 정조 자신의 성격이나 정국 구상과 그 추진 방식 등이 베일을 벗게 됐다.
매사에 빈틈이 없고 완벽을 추구했던 정조도 편지에선 때때로 인간적인 측면을 드러냈다. 심환지에게 “요사이 오랫동안 소식이 없는데, 어째서 정승에 임명하기 전보다도 더 소원한가? 자주 인편으로 편지를 보내라. 단 겸인 중에 잡류(雜流)가 많다 하니, 솎아낼 방도를 생각하여 더욱 치밀하게 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 인용문을 보면 정조가 신하인 심환지에게 편지 왕래를 독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며칠 사이에 계속 연달아 편지가 오가다 일주일 동안 편지가 없자 소원함을 탓하기도 했다. 이는 편지를 통해서 잠시도 자기와 끈을 놓지 못하도록 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이에따라 심환지가 정조와 날카롭게 대립했으며, 심지어 정조를 독살했다는 세간의 주장은 사실상 ‘낭설’임이 판명됐다. 즉 정조는 현안이 발생할 때마다 심환지에게 비밀편지를 보내 미리 의논했으며, 때론 서로 ‘각본’을 짜고 정책을 추진할 정도로 측근으로 중용한 것으로 밝혀졌다. 심지어 정조는 심환지의 큰아들을 “과거시험에서 300등 안에만 들면 합격시키려 했으나 (네 아들이 그러지 못해) 심히 안타깝다”고 위로하는 편지도 보내 둘 사이의 만만찮은 관계를 보여준다. 정조는 또 1800년 6월 28일 타계하기 전인 6월 15일에 보낸 편지에서 “뱃속의 화기(火氣)가 올라가기만 하고 내려가지는 않는다. 고생스럽다”고 호소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조는 심환지 외에도 여러 신하로부터 비밀편지를 주고 받았음이 이번 어찰첩을 통해 은연 중 보여주고 있다.
어찰첩 해석작업에 참여한 김문식 단국대 교수(사학과)는 “이번 정조의 비밀어찰첩으로 그동안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 같은 국가편찬연대기 자료에만 토대를 둔 역사 연구의 일부 방향전환이 이뤄져야 할 것”이라며 “정조가 화성 건설에 몰두하던 1795년 이후 심환지로 대표되는 벽파 세력이 왜 약진했는지 해명할 수 있는 길도 열렸다”고 평가했다. 한편 정조의 이 어찰첩은 학술대회 직후 원래 수장자에게 반환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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