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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는 ‘막후정치’에 능수능란

이슈&화제

by 윤재훈 2009. 2. 9. 2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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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어찰첩 통해 재구성한 정조의 리더십

정조의 비밀 편지가 9일 무더기로 발굴, 공개되면서 정조와 그의 시대를 둘러싼 의문점들이 상당히 풀리게 됐다. 이번에 발굴된 정조의 글들은 그의 문집인 <홍재전서(弘齋全書)>에서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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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적대관계로 알려졌으나 실제로는 빈번한 서찰 교환을 통해 정국을 함께 주도한 것으로 밝혀진 정조와 심환지의 초상. 정조의 어진은 남아있지 않다. 사진은 지난해 방영된 SBS TV 드라마 <비밀의 화원>에서 신윤복(문근영 분)이 정조(배수빈 분)를 그린 초상화(사진 왼쪽)다. 심환지의 영정(오른쪽)은 19세기초 작품으로 보물 1480호이며 후손인 청송 심씨 가문에서 소장해오다 경기도 박물관에 기증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SBS 제공>


◇ 정조의 막후정치=학문을 좋아하는 선비 타입의 군주로 널리 알려진 정조대의 사료는 <정조실록>이 대표적이며,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의 정조대 기록도 있다. 이번에 발굴된 정조의 편지들은 수신된 날짜가 꼼꼼히 기록돼 있어 기존 사료의 이면에 존재했던 사건의 내막과 숨겨진 의도를 밝혀주고 있다. 특히 정조가 편지를 통해 신하들의 행위와 발언을 치밀하게 지시하는 등 공작정치를 펼쳤음이 백일하에 드러나면서 ‘공식’ 사료의 재해석 문제가 대두될 전망이다.

그간 정조는 심환지가 속한 노론 벽파(僻派)와 적대적인 관계를, 시파와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는 것이 통설이었다. 이는 물론 정조 말년의 시대적 상황에 대한 일반적인 고찰과 맞아떨어진다. 하지만 이번 발굴로 정조가 각 당파와 일종의 ‘등거리 정치’를 펼쳤음을 짐작할 수 있게 됐다.

정조가 신하였던 채제공(蔡濟恭·1720~1799)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도 현재 남아 있다. 정조는 노론과 소론, 남인, 시파와 벽파 사이에서 자신의 정치적 위상을 자리매김 하기 위해 노력했고 이를 위해 비밀 편지를 긴요하게 사용한 것이다. 김문식 단국대 사학과 교수는 “정조에 대한 벽파의 정치적 반대 목소리는 커지는데도 계속해서 심환지는 승진했다”면서 “정조가 말년 정국에서 벽파 세력을 정국의 중요한 정치세력으로 인정했음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 정조의 인물 됨됨이=정조는 심환지가 비밀편지의 내용을 누설했다고 수차례 질타하기는 하지만 편지에서 상당히 과격할 정도로 인물평을 늘어놓는 등 격정적인 면모를 보였다.

예컨대 최측근으로 알려진 서용보(徐龍輔·1757~1824)에 대해 정조는 “호로자식”(胡種子)이라고 칭했다.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학자였던 김매순(金邁淳)에 대해선 “입에서 젖비린내 나고 미처 사람 꼴을 갖추지 못한 놈” “경박하고 어지러워 동서도 분간 못하는 놈” “주둥아리를 (함부로) 놀린다”고 혹평했다.

비밀편지의 특성상 구어체와 속담, 비속어도 자주 등장한다. “이 떡을 먹고 말을 참아라”라고 한다거나 “개에 물린 꿩 신세” “꽁무니를 빼다” “말할 건더기” 등의 표현이 이에 해당한다. 심지어 한문 편지 중간에 난데없이 ‘뒤죽박죽’이라는 한글 표현이 등장하기도 한다. 안대회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는 “의미를 분명히 전달하기 위해 ‘뒤죽박죽’을 썼을 수도 있고, 격정적으로 글을 써 내려가다가 마땅한 한문 표현을 생각하지 못해 이렇게 표현했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 독살설은 기각될 듯=<정조실록>은 신하들을 접견하던 정조의 병세가 위중해지자 심환지가 다급하게 정조의 입에 인삼차, 청심원 등의 약을 넣었지만 삼키지 못했고 며칠 뒤 사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에 더해 심환지가 정조와 대립했던 노론 벽파의 우두머리였다는 사실 때문에 그가 정조를 독살했다는 주장이 심심찮게 제기돼 왔다.

하지만 이번에 공개된 편지들에 따르면 심환지는 정조의 정적보다는 그의 심복에 가까웠던 것으로 보인다. 정조는 심환지의 아들이 과거에서 300등 안에만 들면 합격시키려 했으나 그렇지 못했다며 안타깝다고 말할 정도로 친근감을 보였다.

특히 정조는 말년의 편지에서 자신의 병세를 여러차례 소상하게 언급했다. 현대에서도 그렇지만 왕조시대에 왕의 병세는 극비에 속한다. 그를 믿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행동이다.

그는 죽기 두 달 전인 1800년 4월17일자 편지에서 “나는 갑자기 눈곱이 불어나고 머리가 부어오르며 목과 폐가 메마르네. 눈곱이 짓무르지 않을 때 연달아 차가운 약을 먹으면 짓무를 기미가 일단 사라진다 … 그 고통을 어찌 형언하겠는가?”라고 호소한다. 사망 13일 전이자 심환지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의 주제도 심각한 병세에 관한 것이었다. 안대회 교수는 “편지의 기술들을 미뤄볼 때 정조의 사인은 병에 의한 자연사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여론에 민감했던 정조, 그의 비밀편지엔 무슨 내용이?

어질고 능력있는 성군(聖君)도 막후에선 공작정치를 펼쳤고, 험한 말도 마구 쏟아낸 것으로 밝혀졌다. 학문을 사랑하고 선비 같은 국왕으로 칭송받던 조선 제22대 국왕 정조(正祖). 조선조 최고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어진 임금 정조가 재위 말년에 우의정과의 비밀편지를 통해 ‘막후정치’를 주도면밀하게 펼쳤음을 보여주는 비밀편지 299통이 최초로 공개됐다.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과 한국고전번역원 번역대학원은 9일 오전 성균관대 600주년 기념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정조가 예조판서와 우의정 등을 역임한 노론 벽파(僻派)의 거두 심환지(沈煥之, 1730~1802)에게 보낸 비밀 어찰첩(御札帖)을 공개했다. 300통에 달하는 이 편지들을 탈초(정자로 풀어쓰기)하고 해독한 결과, 정조는 여론에 대단히 민감해 공작하려 한 측면이 많았음이 확인됐다. 또 정조의 입 앞에선 온전한 사람이 없었을 만큼 주위 인물들에게 욕설을 마구 쏟아냈다.

이를테면 최측근인 서용보를 ‘호로자식’이라 폄하했는가 하면, 자신이 아끼는 신하인 한원진을 비판했다 하여 김매순을 ‘입에서 젖비린내가 나고 미처 사람꼴을 갖추지 못한 놈’으로, 김이영을 ‘경박해서 동서도 분간 못하면서 선배들에게 주둥아리를 놀리는 놈’이라고 비난을 퍼부었다. 또 19세기 대표적 학자인 김매순 등 많은 명사도 정조로부터 심한 욕설을 들었다.

뿐만 아니라 정조는 고위 관료의 사생활까지도 일일이 간섭했다. 정조는 비밀편지에서 “충청도 관찰사에게는 술을 절제해 감히 체통을 손상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엄중히 신칙하였는가”라고 거듭 확인했다.

1796년 8월 20일부터 1800년 6월 15일까지 오고간 이 편지들은 모두 정조가 친필로 써 심환지 한 사람에게 보낸 것으로, 정조 말년 국왕을 중심으로 정국 동향을 파악할 수 있는 획기적 자료로 평가된다. 비밀편지에는 국왕과 대신이 국정 현안을 놓고 갈등하고 조정하며, 첩보를 수집하고 여론 동향을 캐는 다양하고 은밀한 통치행위의 비밀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이 어찰첩은 조선시대 어찰로는 역대 최대 분량인 데다, 더욱 중요한 점은 정조가 지속적으로 없애라고 명령한 비밀편지를 심환지가 거부하고 고스란히 모은 것이 기적적으로 남아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국왕의 비밀편지가 이렇듯 대량으로 발굴된 예는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어 보물급으로 평가되고 있다.

성균관대 한문학과 안대회 교수는 “국왕과 대신 사이에 국정 현안을 놓고 갈등하고 조정하고 첩보를 수집하며 여론 동향을 캐는 다양하고 은밀한 통치행위의 비밀이 담겨 있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가치를 지닌다”고 평가했다.

또한 이 편지들은 수신자인 심환지 쪽에서 어찰을 받은 날짜와 시간, 장소를 기록해 두었다는 점에서도 역사적 가치를 더한다. 이번 어찰첩의 발굴로 정조시대 정국 동향은 물론이고 정조 자신의 성격이나 정국 구상과 그 추진 방식 등이 베일을 벗게 됐다.

매사에 빈틈이 없고 완벽을 추구했던 정조도 편지에선 때때로 인간적인 측면을 드러냈다. 심환지에게 “요사이 오랫동안 소식이 없는데, 어째서 정승에 임명하기 전보다도 더 소원한가? 자주 인편으로 편지를 보내라. 단 겸인 중에 잡류(雜流)가 많다 하니, 솎아낼 방도를 생각하여 더욱 치밀하게 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 인용문을 보면 정조가 신하인 심환지에게 편지 왕래를 독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며칠 사이에 계속 연달아 편지가 오가다 일주일 동안 편지가 없자 소원함을 탓하기도 했다. 이는 편지를 통해서 잠시도 자기와 끈을 놓지 못하도록 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이에따라 심환지가 정조와 날카롭게 대립했으며, 심지어 정조를 독살했다는 세간의 주장은 사실상 ‘낭설’임이 판명됐다. 즉 정조는 현안이 발생할 때마다 심환지에게 비밀편지를 보내 미리 의논했으며, 때론 서로 ‘각본’을 짜고 정책을 추진할 정도로 측근으로 중용한 것으로 밝혀졌다. 심지어 정조는 심환지의 큰아들을 “과거시험에서 300등 안에만 들면 합격시키려 했으나 (네 아들이 그러지 못해) 심히 안타깝다”고 위로하는 편지도 보내 둘 사이의 만만찮은 관계를 보여준다. 정조는 또 1800년 6월 28일 타계하기 전인 6월 15일에 보낸 편지에서 “뱃속의 화기(火氣)가 올라가기만 하고 내려가지는 않는다. 고생스럽다”고 호소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조는 심환지 외에도 여러 신하로부터 비밀편지를 주고 받았음이 이번 어찰첩을 통해 은연 중 보여주고 있다.

어찰첩 해석작업에 참여한 김문식 단국대 교수(사학과)는 “이번 정조의 비밀어찰첩으로 그동안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 같은 국가편찬연대기 자료에만 토대를 둔 역사 연구의 일부 방향전환이 이뤄져야 할 것”이라며 “정조가 화성 건설에 몰두하던 1795년 이후 심환지로 대표되는 벽파 세력이 왜 약진했는지 해명할 수 있는 길도 열렸다”고 평가했다. 한편 정조의 이 어찰첩은 학술대회 직후 원래 수장자에게 반환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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