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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義妓 ‘계월향’ 영정 공개

이슈&화제

by 윤재훈 2008. 6. 29.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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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평양은 명기()의 고향이라 일컬었다. 이 평양 명기를 대표하는 조선 중기 때 기생이 계월향(). 그에게는 의기()라는 수식어가 따라 다닌다.

임진왜란 당시 평안도병마절도사 김응서()의 첩이던 계월향은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西)의 부장()에게 몸을 더럽혔으나 기지를 발휘해 김응서에게 적장의 머리를 베게 한 뒤 자결했다.

이런 전력으로 말미암아 기생으로는 특이하게 사당에 배향되어 제사를 받는 인물이 된다.

19세기 초반 평양 장향각()이란 사당에 안치했던 그의 영정이 공개된다.

국립민속박물관(관장 신광섭)은 1815년에 제작된 이 영정을 최근 구입, 내달 2일부터 8월11일까지 전시한다고 29일 밝혔다.

영정은 주인공인 계월향이 앉아있는 전신상을 담고있으며 그와 관련된 일화가 그림 윗부분에 적혀있다.

민속박물관은 "조선후기 영정이라고 하면 당시 사회윤리의 근간인 숭현사상()에 따라 사묘()에 봉안하기 위해 제작한 작품이 주로 전하지만 국왕의 어진()이나 일반 사대부 등의 남성 영정 일색인 현실에서 이 계월향 영정은 여성, 그것도 기녀를 대상으로 한 작품이라는 점이 특히 큰 가치를 지닌다"고 말했다.

뿐만 아니라 "머리를 크게 올려 꾸민 형식이라든가 저고리와 치마, 저고리에 달린 향노리개 등은 당시 복식을 엿보게 한다는 점에서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고 덧붙였다.

초상화 전문가로 문화재위원이자 성균관대박물관장인 조선미 교수는 "표정이 살아 있고, 자태가 곱고 앳된 연령이 느껴 질만큼 세부 표현에도 신경을 썼다"면서 "얼굴 윤곽과 코선, 목덜미 등을 따라 붉은 계열의 음영을 짙게 넣되, 코나 목선, 인중 등 특정 부분만을 강조하고 있는 특색이 있다. 이러한 음영법은 19세기 초상화에서 거의 볼 수 없는 드문 표현 방식"이라고 평가했다.

계월향을 배향하는 제사는 이 영정을 제작한 시기인 19세기 초부터 근대까지 이어졌다.

예컨대 동아일보 1921년 4월26일자 기사에는 "1921년 4월22일(음력 3월15일) 평양 의열사()에서 평양기성권번() 주최로 제수를 갖추어 배례했다"는 기록이 발견된다.

(서울=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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