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금융위기의 폭풍이 실물경제를 강타하고 있다. 월가 투자은행들의 와해는 금융시장의 지각 변동은 물론 유통업계와 소비자의 점심 메뉴까지 바꾸어 놓았다.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찾던 소비자들이 지갑을 닫으면서 스타벅스의 매출은 급격히 줄었고, 값싼 정크푸드로 점심을 해결하려는 사람들로 맥도날드는 호황을 맞고 있다.
감원·감봉·실업 등 금융업계에 들리는 흉흉한 소식들, 정크푸드나 PB 상품 또는 대체 상품 등으로 지출을 줄이려는 소비자들과 닫힌 지갑을 열려는 유통업체, 대안 투자로 주목받다가 최근 찬바람을 맞고 있는 예술품 경매시장 등 경제위기와 불황으로 인한 지구촌의 변화된 풍경을 들여다 보자.
지난해부터 몰아치기 시작한 서브프라임 모기지 폭풍은 ‘어, 어~' 하는 사이에 전 세계 금융시장에 이어 실물경제까지 강타하고 말았다. 탐욕스럽게 이익을 추구하며 위기의 불씨가 됐던 뉴욕 월스트리트(Wall Street)만 낭떠러지로 내몰린 것이 아니다. 위기는 이제 메인 스트리트(Main Street: 실물경제를 의미함)까지 속속들이 파고들고 있다.
이로 인한 변화는 그야말로 전방위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특히 미국의 변화는 상징적이다. 월가에서는 세계 금융시장의 상징이었던 투자은행(Investment Bank)들이 와해되고, 고액 연봉자로 이름을 날렸던 금융인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실업자로 전락하고 있다.
평범한 사람들의 생활이라고 이런 불황으로 인한 변화를 피해갈 수 없다. ‘커피 한 잔의 여유'는 사라졌다. 웰빙(Well-being)을 외치기보다 지갑에서 빠져나가는 돈을 단속하려면 ‘정크푸드'라며 외면했던 값싼 햄버거를 입에 물 수밖에 없는 지경이다.
세계 금융의 심장 월가 초토화…… 감봉, 감원에 자살까지
세계 금융의 심장이었던 월가는 초토화됐다. 투자은행(IB)의 전성시대라는 구조는 허물어지고 말았다. 지난 3월 85년 역사의 베어스턴스가 JP모건 체이스에 매각되면서 없어진 데 이어, 위기설이 돌던 리먼 브러더스도 9월 결국 파산보호를 신청했다. 골드만삭스와 모건 스탠리도 재빨리 금융지주회사로 변모, 결국 투자은행 업무를 포기했다. 고수익 고위험을 추구하던 투자은행들이 안전하지만 수익률은 상대적으로 낮은 예금을 다루는 상업은행(Commercial Bank)을 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고액을 받아 챙기던 금융 종사자들의 월급봉투는 얄팍해지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금융사들의 매출이 급감하면서 최고경영자(CEO)에서부터 비서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이런 고통에서 자유롭지 않다고 전했다.
직원들의 보상(Compensation) 전문 컨설팅업체 존슨 어소시에이츠(Johnson Associates)는 월가 CEO와 고위 경영진의 보상이 60~70% 감소할 것으로 보고 있다. 또 다른 컨설팅사인 옵션즈 그룹(Options Group)도 매니징 디렉터들의 보너스가 평균 50%, 해당 분야에서 3년간 부사장을 해 온 사람의 보너스도 55% 줄어들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차라리 감봉이 상대적으로 나을 수 있다. 베어스턴스 사태부터 불기 시작한 월가의 감원 회오리는 점점 강도를 더해가고 있다.
최근 영국 파이낸셜타임즈(FT)는 월가의 감원 규모가 내년에는 7만 명에 이를 것이며, 전 세계적으로 일자리를 잃는 금융업 종사자는 15만 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했다.
‘월가의 족집게'로 불리는 오펜하이머의 금융업 애널리스트 메리디스 휘트니는 파이낸셜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4분기는 아마 매우 파괴적인 시기가 될 것.”이라면서 “자본시장의 강력한 주체들 중 상당수가 25~30% 가량 인력을 줄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나마 상대적으로 사정이 나은 골드만삭스도 지난주 전 세계 인력 3만 2,500명 가운데 10%를 줄이는 구조조정에 돌입했고, 씨티그룹이 2만 3,000명 규모의 감원을 진행 중이다. 메릴린치도 5,700명, 모건 스탠리는 4,400명의 감원을 단행했다.
게다가 잘 나가던 금융업 종사자들의 자살 소식까지 들려 오며 월가의 흉흉한 분위기를 심화시키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최근 베어스턴스의 베테랑 펀드 매니저였던 배리 폭스가 자살한 것으로 확인됐다고 보도했다. 9년간 베어스턴스에 몸담아 왔던 폭스는 회사가 파산한 뒤 이 회사를 인수한 JP모건 체이스가 자신을 고용하지 않겠다고 밝히자 상심한 나머지 약물을 복용한 채 아파트 29층에서 뛰어내려 목숨을 끊었다. 열심히 일했던 회사가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고용이 보장되지 않아 재정적인 어려움을 걱정하면서 결국 잘 나가던 펀드 매니저는 자살로 해법을 찾고 말았다.
신문은 이 밖에도 실직한 재무 관리자가 자신의 가족을 몰살하고 자신의 목숨을 끊기도 했으며, 시장이 폭락하며 손실을 감당하기 어려워진 선물 거래자도 자살하는 등 흉흉해진 월가 분위기를 전했다.
전 산업에 퍼진 실직의 공포…… 맥도날드만 호황
버락 오바마 미국 44대 대통령 당선자는 당선 전부터 일자리 창출에 목소리를 높였다. 그럴 만도 하다. 연일 파산보호를 신청하거나 다른 기업에 인수되는 방법으로 살 길을 찾는 기업들이 늘어 가고 있고, 살아남은 기업들도 바짝 허리띠를 졸라매며 감원 규모가 크게 부풀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10월 실업률은 6.5%로 14년 7개월 만에 최고치까지 치솟았다.
이렇게 실직의 공포가 몰아치며 모기지 대출금을 갚기도 벅찬 소비자들은 지갑을 닫고 있다. 소비 지출이 전체 경제 규모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미국 경제는 물론, 미국 기업과 소비자들을 대상으로 수출, 고성장세를 누릴 수 있었던 개발도상국들까지 줄줄이 어려움에 빠지게 하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이나 뉴욕타임스 등 주요 신문들까지도 ‘어떻게 하면 절약하며 살 수 있는가'에 대한 기사들을 꾸준히 싣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 웹사이트에는 <고난의 경제(Crunchonomics)>라는 코너까지 만들어져 있다(http://online.wsj.com/public/page/crunch.html). 여기에는 에너지를 절약하는 법, 재무 계획 세우는 법, 신용시장이 얼어붙으며 카드 한도가 줄어들자 유통업체들이 어떻게 소비를 유도하고 있는가 등의 내용이 올라와 눈길을 끈다.
점점 자린고비가 되어가는 미국의 소비자들은 꼭 필요한 물건의 경우 저렴한 대체재를 찾고 있다. 킴벌리 클라크의 CEO 토마스 포크는 “최근 유아용품 가운데 배변 훈련용 팬티 판매가 급감하고 있다.”면서 “이 보다 더 싼 기저귀를 사는 쪽으로 소비자들이 옮겨가고 있다.”고 말했다.
브랜드 충성도(Brand Loyalty)도 사치. 세이프웨이(Safeway)나 크로거(Kroger) 등 슈퍼마켓 업체들이 제조업체와 직접 거래함으로써 마진을 줄여 저렴한 가격에 내놓는 자체 브랜드 상품(Private Brand) 판매가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위기의 소비자들(Shopper in Crisis)>이라는 최근 보고서는 소득 상위 소비자들의 41%가 불필요한 소비를 줄이고 있다고 밝혔고, 이들 가운데 4분의 1은 선호하는 브랜드 구매도 포기했다고 전했다.
은행들이 살기 위해 속속 수수료를 인상하자, 은행을 이용하지 않는 사람도 늘고 있다고 월스트리트저널은 보도했다. 텍사스 플라워 마운틴에 사는 올해 38세의 엔지니어 뱌스카르 사르카르는 최근 은행 거래를 끊었다. 대신 피델리티의 증권 계좌에 돈을 넣었다. 이 계좌에서는 돈을 찾을 때 현금지급기(ATM) 수수료를 내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불황으로 스타벅스는 직격탄을 맞고 있다. ‘커피 한 잔의 여유'나 ‘분위기'를 찾는 사람들이 줄면서 최근 발표한 분기 순이익은 한 해 전에 비해 98%나 급감했다. 그러나 테이크 아웃(Take-out)용 고급 커피를 판매하기 시작하면서 스타벅스와 경쟁하게 된 맥도날드는 사정이 다르다. 맥도날드의 10월 동일 점포(1년 이상 영업을 계속하고 있는 점포) 매출은 1년 전 대비 8.2% 늘었다.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커피, 그리고 한때 정크푸드로 버림받았지만 값이 싸다는 이유로 사람들의 한 끼 식사로 다시 인기를 끌고 있는 햄버거 판매가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렉 허스트 시카고대학 교수는 “이런 현상은 경기후퇴(Recession)가 발생할 때에는 늘 있다.”면서 “실직을 하거나 가용 소득이 줄어들 때 사람들은 고급 커피 등 사치품 소비를 줄이게 된다.”고 말했다.
예술품 경매시장도 ‘찬바람'
대안 투자로 주목을 끌었던 예술품 경매시장에도 찬바람이 불고 있다. 지난해까지 미술품 경매시장은 100억 달러 규모에 달하며 급성장해 왔지만 위기는 이 시장도 얼어붙게 만들고 있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지난주 크리스티(Christie's)에서 열린 경매에서는 마네, 세잔, 르느와르, 윌렘 드 쿠닝 등의 작품들이 모두 유찰됐다. 1년 전 거래되던 가격에 비해서 훨씬 낮았는데도 말이다. 이날 28개 작품을 경매에 붙이면서 크리스티는 일부러 가격이 낮은 몇몇 작품들로 바람을 잡았지만 헛수고였다.
런던의 한 딜러는 “모든 가격이 예상했던 것보다 낮아지고 있다. 사람들은 두려움에 빠져 있는 듯 보인다.”고 말했다. 이날 경매에 참여했던 크리스티 명예회장 크리스토퍼 버지 역시 “시장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고 언급했다.
- 김윤경 / 이데일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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